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문단 편집) === 공성전 - 격전의 5월 === 4월 5일 술탄의 마지막 부대까지 합류하자, 메흐메트는 그의 정예병들을 후방에 있는 동로마 성채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마르마라 해 쪽에 있는 스투디우스의 작은 성들은 금세 함락되었고, 보스포루스 해협의 테라피아 요새도 며칠 안에 무너졌다. 마르마라 해에 있는 섬들은 쉴레이만 발타오울루(Süleyman Baltaoğlu)가 이끄는 오스만 함대가 점령한다. 그 기간 동안 오스만 군의 우르반 거포가 성벽을 두들겼으나, 당시 화약무기가 으레 그랬듯 정말 낮았던 정확도에 무지막지하게 긴 장전시간까지 곁들어져 동로마 부대는 충분한 수리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고, 거포는 기대를 따라주지 못했다.[* 다만 성벽에 제대로 명중하면 그야말로 '박살' 이었으므로, 수비군은 낮에는 적군과 싸우고 밤에는 성벽을 수리해야 하는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수비군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조금씩 한계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우르반 거포는 기대치까지는 아니었지만 밥값은 한 셈.] 해안에서의 싸움도 맘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술탄도 그의 빈약한 해군을 데리고 금각만을 돌파할 생각까지는 없었다. 금각만 입구에 쳐놓은 방어용 사슬 때문에 배들이 만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대는 기본 임무인 해안 봉쇄도 제대로 해놓지 못했다. 4월 20일에 4대의 선박이 치열한 싸움 끝에 봉쇄망을 뚫고 만으로 진입했다. 이 선박들 가운데 세 척은 교황의 의해 지원된 제노바 함선이었고, 한 척은 동로마 제국의 함선으로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식량을 구하기 위해 크레타 섬에 보내졌었다. 이들의 무사귀환으로 방어자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술탄은 오스만 함대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결국 발타오울루는 해임되고[* 당시 오스만 측이 동원한 함선은 30여 척이나 되었는데 겨우 4척의 적함에게 쩔쩔맨 꼴. 이 사태에 화가 날 대로 난 메흐메트는 쉴레이만 발타오울루를 당장 끌어내어 참수하라고 명령했지만 고관들은 물론 쉴레이만의 부하들까지도 대충 싸운 게 아니라 쉴레이만 본인도 부상당했을 정도로 열심히 싸웠는데도 그 모양이 된 것이라고 변호했고, 결국 메흐메트는 그렇다면 쉴레이만의 모든 작위와 재산을 박탈하고 그 재산은 예니체리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령했다.] 새 제독으로 함자 베이가 임명된다.[* 이렇게 된 이유는 당시 오스만 해군의 전함은 기껏해야 [[갤리선]]의 수준을 조금 넘는 것들이었지만 동로마 함선은 '''원시적인 [[갤리온]]'''이었기 때문이다.] [[파일:vd2yH4A.jpg]] (그림. 배를 언덕 너머로 옮겨 금각만에 진입하는 오스만 해군.) 메흐메트는 이 금각만이 계속 열려있는 한 공성의 성공이 묘연하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탐색한다. 그는 금각만 북쪽 갈라타에 기름칠된 통나무들을 놓아 그 위로 배가 지나갈 수 있는 지상통로를 만든다. 이 통로를 통해 갈라타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언덕 너머로 함선을 옮겨 금각만에 진입한다]]'''는 대담한 작전.[* 이처럼 배가 산으로 간 전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베네치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15년 전에 육지로 함선을 옮기는 작전을 쓴 적이 있었고, 오늘날 학자들 가운데에는 메흐메트가 여기에서 착안한 것이 아닌가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또 그리스 신화의 내용이기는 하지만 황금 양털로 유명한 [[이아손]]과 선원들이 [[아르고 호의 원정|아르고 호]]를 등에 짊어지고 북아프리카의 리비아에서 알제리까지 행군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4월 22일에 전체 함대 가운데 절반이 이 길을 통해 금각만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명목상 중립이었던 금각만 건너편의 제노바인 식민지 페라에서 오는 보급을 위협할 수 있었고, 방어군 사이에서는 불안감이 퍼지게 된다. 28일 저녁 방어군은 오스만 함대를 화공선으로 공격하려 하지만 제노바인의 밀통으로 인해[* 원래 작전은 베네치아인들만 참가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당시 제노바인들 가운데에는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스만과 밀통하는 자들도 있었기 때문. 하지만 베네치아의 작전에 대해 전해들은 제노바인들은 자기네들도 끼겠다고 항의했고, 제노바 함선 세 척이 오스만 함대 수십 척을 상대로 멋지게 싸웠던 것을 기억하는 황제 콘스탄티노스는 베네치아에 제노바도 끼워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황제의 요청을 뿌리치지 못한 베네치아는 제노바도 끼는 것으로 했지만, 그 결과는 좋지 못했다.] 오스만 군은 이를 미리 예상했고, 방어군은 오히려 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한다. 40명의 이탈리아인 선원이 침몰하는 함선에서 탈출해 금각만 북쪽에 다다르지만 오스만 군에게 사로잡혀 방어군이 보는 앞에서 처형당한다. 방어군은 보복으로 260명의 오스만군 [[포로]] 전원을 참수한다. 이 오스만 군 함대는 계속 금각만에 주둔하게 되고, 결국 방어군은 선원 가운데 일부를 성벽에 올리는 등 금각만에 면한 성벽에도 병사들을 다수 주둔시켜야 했다. 5월 3일 동로마 내부의 물자들이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12명의 병사가 임무에 자원했고, 소형 선박 하나가 야음을 틈타 방어선을 피해 베네치아 함대에게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빠져나간다. 해안에서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지상에서는 오스만 군의 공세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상에서의 방어는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힘입어 철통 같았고, 예니체리가 중심이 된 공세는 번번히 실패한다. 계속되는 포격은 분명 적의 성벽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모르토르로 안쪽이 가득찬 성벽은 좁은 틈새만 허용했을 뿐이었다. 이곳으로 병력들이 누차 투입되었으나, 성벽의 방어 체계 앞에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5월 6일 성 로마누스 문 방면이 포격으로 붕괴했다. 문제는 이쪽의 성벽이 리쿠스 강이 흘러드는 지역이라, 다시 성벽을 보수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역으로 리쿠스 강이 만들어낸 골짜기로 인해 해자를 형성하기도 어려운 이곳은 공격도 쉽지는 않았다. 주스티니아니는 뒤쪽에 새 성벽을 쌓는 것으로 대신한다. [[파일:external/i57.fastpic.ru/13c3a029a87d418e9111541e0845a3b5.jpg]] 5월 7일 메소티히온에 2만 5천의 오스만군이 투입되었지만, 그보다 10분의 1 수준인 방어군에 의해 3시간의 격전 끝에 격퇴된다. 이런 공세로 인해 지상군의 부담이 커지고 결국 금각만 방면의 해군에서 또 다시 일부 병력을 빼와야 했다. 12일 다시금 공세가 재개되었고, 이전에 투입되지 않은 나머지 병력들이 공세에 투입되었다. 이번에는 성벽에 꽤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이쪽으로 병력들이 투입된다. 황제의 근위대까지 동원되어 입구를 틀어막았으며 결국에는 방어에 성공한다. 5월 18일 공성탑을 동원하여 해자를 넘어 외벽에 적은 피해로 접근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날 저녁 수비대가 놓여있던 공성탑을 죄다 불살라 버린다. 동로마는 그새에 다시 성벽을 보수하는 데 성공한다. 성과없는 정면 공격이 계속되자, 오스만 군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갱도 건설을 계획한다. 5월 중순부터 공사가 시작되었고, [[세르비아 공국|세르비아]]의 광산인 노보 브르도(Novo Brdo)에서 일하다가 세르비아가 파견한 지원군에 속해 끌려온 광부들이 주가 되었다. 이들은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의 지휘 아래 공사를 진행하나, [[스코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출신의 방어군 측 기술자 요하네스 그랜트(Johannes Grant)가 이 땅굴과 이어지는 또다른 땅굴을 팠고, 동로마 병사들이 그곳을 통해 공사 인부들을 공격한다. 방어군은 5월 16일, 오스만 군이 판 갱도를 차단하고, 21일, 23일, 25일에 다른 갱도들을 차단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스의 불]]의 투입과 치열한 전투 끝에 이 땅굴들은 파괴된다. 방어군은 5월 23일 2명의 오스만 장교들을 사로잡았고, 고문끝에 이들은 모든 갱도의 위치를 발설한다. 위치의 발설로 모든 갱도들이 방어군의 손에 파괴되면서, 갱도를 이용한 돌파도 실패한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오스만군 지휘부도 애가 타기 시작한다. 메흐메트 2세가 공성군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걸어보기도 하고, 공성기로 성벽을 공략하기도 해봤으나 전부 무용지물. 날짜가 바뀔수록 성벽 공격의 주력인 예니체리 부대의 손실은 점점 커져갔다. 오스만의 최정예나 다름 없는 예니체리를 이렇게 소모하는 것은 여러모로 이득이 아니었다. 오스만에게는 여전히 적이 많았고, 나중을 생각하면 예니체리 부대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결국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스 11세|황제]]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할 것을 권유한다. [[콘스탄티노폴리스|도시]] 내의 모든 거주민과 황제의 재산의 보호, 황제가 가진 [[모레아 전제군주국|모레아]]([[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대한 권리 보장 및 통치 위임, 도시에 남을 이들의 안전 보장 등을 골자로 한 내용으로 이 항복 권유는 도시 공략에 계속 애를 먹는 술탄으로서는 진심으로 한 제안이었을 것이다. 이 항복 권유를 받고,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메흐메트 2세|술탄]]의 호의와 관대함에 커다란 경의를 표했으며, [[아나톨리아]] 및 그 외의 술탄의 모든 점령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한다. 하지만 항복 권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정중히 거절한다. > "미안하오만, [[콘스탄티노폴리스|이 도시]]를 넘겨주는 일은 [[콘스탄티노스 11세|짐]] 뿐만 아니라 이 도시에 살고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오. [[필사즉생행생즉사|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사에 따라 죽기로 결정했고,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이오.]][* 원문 - Τὸ δὲ τὴν πόλιν σοῖ δοῦναι οὔτ' ἐμὸν ἐστίν οὔτ' ἄλλου τῶν κατοικούντων ἐν ταύτῃ• κοινῇ γὰρ γνώμῃ πάντες αὐτοπροαιρέτως ἀποθανοῦμεν καὶ οὐ φεισόμεθα τῆς ζωῆς ἡμῶν. 본문의 내용은 이 [[영어]] 번역문을 토대로 글 내용에 어울리도록 좀 더 매끄럽게 번역했다. Giving you though the city depends neither on me nor on anyone else among its inhabitants; as we have all decided to die with our own free will and we shall not consider our lives.] [[항복]] 권유가 거절당한 뒤, 메흐메트 2세는 휘하 장수들을 모두 불러 모아 앞으로의 공성에 대해 논하고자 참모회의를 열었다. 재상(Vezir-i âzam)이었던 할릴 파샤(Halil Paşa)는 이전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공격에 반대해왔다. 그는 이미 오스만군의 피해가 막심하며, 더이상의 공격은 무의미하다며, 공성을 포기할 것을 주장했다. 반면 메흐메트가 왕자였던 시절부터 수행해 온 오른팔에 해당하는 부재상(Vezir-i sani) 자아노스 파샤(Zağanos Paşa)는 술탄의 위엄에 타격을 입을 것을 들어 할릴 파샤의 주장에 반대했으며,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메흐메트 2세는 자아노스 파샤의 손을 들며, 보다 잘 정비된 군으로 수비군을 압도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미 오랜 공성전으로 방어군 측의 피로는 극에 다했다고 판단한 술탄은 지금까지의 공세와는 달리 '''이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투입한다'''고 결정했다. 재상까지 반대하는 마당이었으니, 이 공격마저 실패할 경우 술탄은 철수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5월 24일은 보름달이 뜨는 날이었다. 달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상징이기도 했는데 때마침 그 날 개기월식이 있었다. 이를 콘스탄티노폴리스 측에서는 도시가 패망할 흉조라고 여겼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달이 떠있는 동안 함락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그런데 보름달이 떠야할 날에 월식이 일어났으니 사기가 떨어지는 게 당연하다.] 또 이 당시에 [[로마 제국]]은 첫 [[로마 황제|황제]]의 이름과 같은 사람의 치세 동안에 멸망한다는 전설도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었는데, 당시의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 [[노바 로마]], 즉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한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로 여겨지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같은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미 1,000여년 전 [[서로마 제국]]이 [[고대 로마|로마]]의 건국자였던 [[로물루스]] 및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이름이 같았던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 때 멸망한 전례가 있으니. 또한 며칠간 도시엔 엄청난 뇌우가 퍼부었고 짙은 안개가 자욱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이 도시가 패망할 불길한 징조로 여겨져서 방어군 측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이 밖에도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꼭대기에 붉은 빛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다른 모든 징조들과는 달리 이 불빛은 오스만 측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즉 오스만군의 눈에도 보였다는 말인데, 이 빛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설이 없는 상황.] 5월 26일 오스만군은 총공세를 위한 준비에 들어간다. 준비는 공세 결정이 내려진 후 36시간 동안 계속되었으며, 오스만군은 가능한 모든 전력을 배치하고 공세를 계획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5월 27일에는 5월 3일 몰래 포위망을 빠져나갔던 베네치아 함선 특공대원 12명이 귀환하였으며, 주변 해역을 샅샅이 수색했지만 더이상의 서방 지원군은 없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오스만군 쪽 첩자가 공세 일시를 알려주었지만 방어군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5월 28일 공세의 성공을 위해 대규모 [[이슬람]] 의식이 행해지고, [[이맘]]들은 투입될 병사들을 독려하며 시간을 보낸다. 같은 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황제]]가 주선하는 예배가 열린다. 황제는 [[가톨릭]]과 [[정교회]] 양측을 대표했다. 같은 날 황제는 수비군과 지휘관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는데, 일부분을 가져오면 다음과 같다. || 수비군 전원에게 || [[죽음]]을 감수할 만한 [[명분]]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다. [[기독교|신앙]], 고향, 가족, 조국이 그것이다. 이제 그대들은 목숨을 걸고, 이들을 지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콘스탄티노스 11세|짐]] 역시, 짐의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느니라. || || 지휘관들에게 || 짐은, [[오스만 제국|우리의 신앙의 적들]]이 우리를 위협하는 이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이 아름답고 이름 높은 도시]]와 [[동로마 제국|짐의 나라]]를 지키는, 그대들과 그대들의 자질을 믿소. 만일 짐이 본의 아니게 그대들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면, 지금 사죄하는 바이오. || || 서유럽인 지휘관들에게 || 오늘 이 순간부터, [[라틴인]]과 [[로마인]]은[* 라틴인과 로마인이 서로 구별 및 병치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같은 신앙으로 뭉쳐진 한 백성들이오. 그리고 하느님께서 도우신다면, 우리는 이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 것이오. || 이날의 공세가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수도]]를 둘러싼 서로의 마지막 총력전이 될 것임을 두 제국은 예감할 수 있었다. 29일 자정, 오스만 측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